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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L Nostalgia] '도깨비 신부' 주닝요 파울리스타 <10>

[EPL Nostalgia] '도깨비 신부' 주닝요 파울리스타 <10>

  • 기자명 이형주 인턴기자
  • 입력 2017.02.14 07:51
  • 수정 2017.02.1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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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프리미어리그 공식 홈페이지 캡처

[STN스포츠=이형주 인턴기자] Nostalgia, 과거에 대한 향수란 뜻이다.

지금 EPL 무대에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많이 모여 있다. 그 원동력은 이전의 선수들이 우수한 플레이로 팬들을 매료시키며 EPL을 발전시켜왔기 때문이다. 이에 EPL Nostalgia에선 일주일에 한 명씩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선수들을 재조명해본다.

◇'도깨비 신부' 주닝요 파울리스타 <10>

최근에는 많이 희석되긴 했지만, 미들즈브러 FC를 떠올리면 가장 많이 생각나는 이미지는 ‘도깨비’ 팀이라는 이미지였다. 당시 2000년 대 초반 최정상급의 전력을 지녔던 첼시 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격파하는 등 뜬금없이 강팀들을 잡아냈기 때문이다. 그런 미들즈브러의 팬들이 정말 좋아하는 선수라면 ‘도깨비 신부’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미들즈브러와 주닝요는 도깨비와 도깨비 신부처럼 몇 번의 이별을 겪기도 했다.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 주닝요는 잉글랜드 언론 ‘텔레그래프’가 선정한 역대 브라질 국적의 프리미어리거 랭킹 2위에 오르기도 한 뛰어난 선수다. 또한 아는 분들에겐 지겨운 얘기겠으나, 올림피크 리옹의 레전드로서 프리킥의 달인이었던 주닝요 페르남부카누와는 다른 선수다.

주닝요는 1973년 브라질 상 파울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두각을 나타냈던 그였다. 이투아누 FC 유스팀을 거쳐 상 파울루 FC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주니뉴는 1993년 남미 챔스로 불리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로 인해 전 유럽 클럽의 주목을 받았다.

때문에 1995년 당시 주닝요 영입에 관심 있는 유럽 탑 구단들이 수두룩했다. 여러 곳에서 오퍼를 받았지만 주닝요의 선택은 프리미어리그에 갓 승격한 미들즈브러였다. 주닝요는 곧 ‘작은 남자’란 뜻의 ‘더 리틀 펠라’로 불리게 됐다. 작은 체구와 라디오 진행자 데이브 로버츠의 발언으로 인해서였다. 하지만 주닝요의 존재감은 결코 작지 않았다.

주닝요는 데뷔전부터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이후 시즌 내내 환상적인 활약을 펼쳤고, 주닝요의 활약 덕에 미들즈브러는 승격 첫 시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2위라는 호성적을 거뒀다.

이후 두 번째 시즌인 1996/97시즌을 맞이했다. 중반까진 괜찮았다. 리그 성적이 하위권이긴 했지만 반등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리그컵과 FA컵 모두 결승에 올랐다는 점이 고무적이었다.

하지만 미들즈브러 그리고 주닝요의 1996/97시즌은 눈물로 끝나고 말았다. 두 결승전에서 모두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다. 리그에서는 승점 삭감, 주축 선수들의 부상 등이 겹치며 주닝요의 고군분투에도 19위로 강등 당했다. 주닝요는 프리미어리그 사무국으로부터 1996/97시즌 최우수 선수상을 받았지만, 팀의 강등 앞에 큰 의미가 될 순 없었다.

주닝요는 미들즈브러를 너무도 사랑했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출전을 위해 선택이 필요했다. 이에 주닝요는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둥지를 옮기게 됐다. 하지만 셀타 비고와의 리그 경기에서 미첼 살가도의 태클을 당해 부상당했다. 이로 인해 그토록 원했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출전도 좌절됐다.

주닝요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서 펼친 활약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주닝요의 머릿속에는 미들즈브러에 대한 생각이 가득했다. 결국 1999/00시즌 주닝요는 임대 신분으로 미들즈브러 유니폼을 입고 맘껏 활약한다.

임대 생활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강등을 당했다. 세군다리가로 내려간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는 주닝요의 급료를 감당할 수 없었다. 때문에 CR 바스코 다 가마, CR 플라멩구 임대 생활을 거쳤다.

여러 팀을 전전하면서도 주닝요의 마음 속 고향은 미들즈브러였다. 그 곳에서 빨간 유니폼을 입고 뛰는 것을 희망했다. 그는 2002 한일 월드컵 제패 후 미들즈브러 복귀를 택했다. 이후 주닝요의 활약은 물 만난 고기였다. 유려한 드리블로 상대 진영을 헤집어 놨다. 또한 득점력도 상승해 지난 두 번의 미들스브로 생활보다 경기당 득점이 상승했다. 2004년엔 리그컵 우승도 이끌어내며 지난 갈증을 해소했다.

하지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시절 당했던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그의 부상 상태는 악화됐고, 미들즈브러에서 프리미어리그 생활을 더 하기에는 적합치 않았다. 그는 박수칠 때 떠나기로 맘 먹고 셀틱으로 이적했고, 이후 몇 년 동안 선수생활을 더 이어간 뒤 은퇴했다.

세 번의 만남, 세 번의 이별. 잉글랜드 북동부의 작은 도시 미들즈브러에 주닝요는 많은 추억을 안긴 선수였다. 지금도 스튜어트 다우닝과 더불어 미들즈브러 팬들이 너무도 사랑하는 선수로 기억되고 있다.

◇EPL 최고의 순간

1995년 11월 4일 프리미어리그 12R. 키가 작은 브라질 남자가 미들즈브러 유니폼을 입고 데뷔전을 치렀다. 최고의 스타가 왔다는 설렘과 세간의 기대를 충족시켜줄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경기장에 공존했다.

하지만 미들즈브러 팬들이 그를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반 11분 주닝요는 왼쪽 터치라인을 따라 공을 몰고 내달렸다. 이어 정확한 스루 패스를 얀 앙게 피요토프트에게 줬다. 피요토프트가 슈팅을 했고 득점이 됐다. 비록 전반 45분 브라이언 딘의 만회골로 인해 결승 어시스트가 되진 못 했지만, 미들즈브러와 주닝요가 이뤄낼 역사의 출발점이었다.

◇플레이 스타일

창의적인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환상적인 드리블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전진 패스 또한 훌륭했다. 주력과 득점력도 준수해서 눈 깜짝할 사이에 골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공격에 있어서 영향력이 대단했다.

◇프로필

이름 - 주닝요 파울리스타

국적 - 브라질

생년월일 - 1973년 2월 22일

신장 및 체중 - 168cm, 59kg

포지션 - 공격형 미드필더

국가대표 경력 - 49경기 5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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