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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야구]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Ozzie Smith)''

[해외야구]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Ozzie Smith)''

  • 기자명 김성영
  • 입력 2011.01.27 11:35
  • 수정 2014.11.14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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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AP 뉴시스]

 

 

모든 메이저리거들의 꿈 중의 하나는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는 것일 거다. 그러나 자신의 장점을 메이저리그에서 돋보적으로 살리며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인물이 있다. 바로 오즈의 마법사 '아지 스미스 (사진 맨 왼쪽, Osborne Earl "Ozzie" Smith)'.

 

 
아지 스미스는 19561226일 알라바마에서 6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지 스미스는 6살이 되던 해에 캘리포니아주 LA로 이주했는데, 당시 그의 아버지는 트럭 배달업을...어머니는 간호 보조로 생계를 유지했다.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의 재능만큼은 어려서부터 돋보였다.
 
아지 스미스는 야구를 가장 좋아했지만 유년기 시절부터 다양한 스포츠를 즐겼다. 그는 또 그의 집 앞 콘크리트 계단에서 수 없이 볼을 튕겨보는 등의 활동들을 하면서 반사 능력을 뛰어나게 발달시킬 수 있었다. 아지 스미스가 주니어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때 부모님은 이혼을 했다. 그러나 그의 야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버스를 한 시간정도 타야 도착할 수 있는 다저스타디움에 그는 매년 수십번 들르며 LA다저스를 응원했고 로크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직접 야구 선수로 활동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로크 고등학교에서 농구와 야구팀 선수로 활동했는데, 농구 팀에서는 팀 메이트로 Marques Johnson(NBA에서 5번의 올스타에 선정될 정도로 뛰어난 플레이어)과 함께 했고 야구 팀에서는 Eddie Murray(2003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에 입성)와 플레이를 같이 했다.
 
1976년 아지 스미스는 아이오와주에서 세미프로야구 선수로 활동했는데, 아마추어 드래프트 7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드래프트됐다. 하지만 잘 될 것 같았던 계약은 금액차이로 어긋났다. 아지 스미스는 $10,000(현 가치 $38,217)를 원했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는 $8,500(현 가치 $32,484)를 상한선으로 못박았던 것이다. 결국 $1,500 차이로 계약을 실패했고 아지 스미스는 메이저리그의 미련을 버리고 다시 세미프로리그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년 뒤, 1977년 아지 스미스는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 진출의 기회를 얻게 됐다. 그의 고향과 가까운 팀인 샌디에이고 파드리스가 4라운드에서 그를 지명한 것이다. 금액은 $5,000...1년 전보다 훨씬 적은 금액이지만 아지 스미스는 고향과 가깝다는 것에 금액을 뒤로하고 메이저리거로서 활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계약 후 아지 스미스는 첫 해 마이너 북서리그에서 경기를 뛰었다. 과거 Berdy Harr에게 스위치 타법을 익힌 터라 그는 마이너리그에서도 스위치 타법을 구사할 수 있었다.
 
1978년은 아지 스미스에게 역사적인 해였다. 그 해 봄 애리조나 유마에서 논-로스터 신분으로 스프링캠프에 초대받았는데, 파드리스 감독 Alvin Dark의 도움과 그의 피나는 노력으로 메이저리그 데뷔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7847일부터 유격수로서 역사를 쓰는 순간이었다.
 
메이저리그에서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는데에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다. 특히 420일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4회초 투아웃 상황에서 Jeff Burroughs가 친 2루를 지날 듯한 볼을 아지 스미스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맨손으로 잡아 1루로 송구해 아웃시켰던 것이다. 경악 그 자체였다.
 
그는 타격에서 메이저리그 데뷔 첫 해 159게임에 출전해 0.258의 타율, 1개의 홈런, 46타점을 기록했다. 타격으로 보면 평균 이하의 성적. 그러나 그는 Bob Horner에 이어 신인왕 투표 2위를 차지했다. 왜 일까? 그는 그해 필드에서 40개의 도루와 유격수로서 엄청난 수비를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샌디에이고에서의 그의 선수생활은 정확히 4시즌이었다. 4시즌 동안 그는 눈부신 수비능력과 도루 능력을 보여줬지만 타격에서는 평균의 성적이었기 때문에 늘 계약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사무국과 마찰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타격을 뒤로하더라도 수비와 움직임이라는 요소가 경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기 때문에 이미 메이저리그에서는 그를 주시하는 팀들이 많았다.
 
1980년 그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유격수로는 단일 시즌 621개라는 엄청난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했고 이런 뛰어난 활약으로 생애 첫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이 첫 수상이 13년 연속 수상의 서막인 것이다. 이런 아지 스미스의 뛰어난 수비는 급기야 1981년 유마 데일리 선지가 그를 다룬 기사에서 "오즈의 마법사"라는 닉네임을 붙이기까지 했다. 자신의 강점을 제대로 부각시켰기에 메이저리그에서 손꼽히는 유격수가 됐고 결국 그는 1981년 올스타에 선정됐다.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는 타격을 제외한 그의 플레이를 높이 샀지만 타격을 기준으로한 연봉문제에서는 줄다리기를 계속했다. 팽팽한 상황은 결국 줄을 끊어지게 했다. 아지 스미스는 19822월 샌디에이고 생활을 청산하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이적하게 됐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유격수 Garry Templeton과의 맞트레이드가 이뤄졌는데,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이 트레이드로 훗날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유격수를 얻게 됐다. 사실 이 트레이드는 Garry Templeton이 관중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취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인 Whitey Herzog가 적극적으로 그를 내보낼려고 했기 때문에 쉽게 가능했다.
1982211일 아지 스미스는 카디널스 맨이 됐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인 Whitey Herzog는 샌디에이고에서 골든글러브 2번을 수상한 아지 스미스의 공격력을 향상시키는데 땅볼이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하루는 Whitey Herzog가 스프링캠프 기간에 아지 스미스에게 다가와 이런 말을 했다. "네가 경기 중에 플라이 볼을 치면 넌 나한테 구두 한 켤레를 빚진 거다. 하지만 네가 타석에서 땅볼을 친다면 내가 빚진 걸로 하자. 이건 우리가 함께 있는 한 늘 지켜야 하는 거다."(Smith and Rains. 1988. P61 발췌) 아지 스미스는 동의했고 시즌 말미에 Whitey Herzog감독으로부터 $300을 받았다. Whitey Herzog 감독은 발빠른 선수를 기용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아지 스미스가그의 머릿속에 딱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는 훗날 아지 스미스의 대해 이런 언급을 했다. "만약 그가 수비로 두 점의 실점을 막았다면 그건 나에게 공격으로 두 점을 뽑아낸 것처럼 보였다."
 
1982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개막 초부터 12연승을 내달리며 상승세를 탔다. 결국 그 상승세는 그 해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때 까지 쭉 이어졌다. 특히 아지 스미스는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0.556의 대단한 타율을 자랑했고 그가 이적 첫 해 우승반지를 끼는 영광을 얻을 수 있었다. 더불어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15년 만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83년과 1984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물론 아지 스미스는 꾸준한 플레이를 펼치며 해를 거르지 않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1985년 아지 스미스는 스위치 히터로서 활약하며 타율을 상승시켰다. 그 해 0.276의 타율을 기록한 아지 스미스는 많은 팬들이 아직도 잊지 못하는 명장면을 만들었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2년 연속 부진을 보이다 1985년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는데, 지구 우승 뒤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LA 다저스와 대결하게 됐다. 시리즈 전적 22패로 팽팽한 상황에서 마지막 5차전은 홈 구장인 부시 스타디움에서 치러졌다.
 
22 동점인 9회말 LA 다저스의 Tommy Lasorda 감독은 마무리 투수 Tom Niedenfuer을 투입했다. 이때 아지 스미스는 타석에 들어서는데, 스위치 히터였던 그는 왼쪽 타석에서 공을 기다렸다. 사실 아지 스미스는 데뷔 후 좌타석에서 홈런을 한 개도 때려내지 못한 터라 그의 장타를 기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한 듯 아지 스미스는 좌타석에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때려냈고 그의 이 홈런으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하게 됐다. 좌타석 3009타수 만에 때려낸 유일한 홈런인 이 끝내기 홈런은 세인트루이스 구단의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아직도 남아있다.
 
한 해를 보낸 뒤 아지 스미스는 1987년 본인의 최고의 기록을 장식했다. 0.303의 타율, 43개의 도루, 75타점, 104득점, 40개의 2루타...
 
유격수부문 실버슬러거를 수상했다! 게다가 8년 연속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함으로써 공수 모두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즌이었다. MVP에서도 아지 스미스는 시카고 커브스의 Andre Dawson에 이어 2위를 차지해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의 꾸준한 활약은 연봉에서도 돋보였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그가 1988년 홈런을 한 개도 치지 못했지만 $2,340,000의 연봉을 안겨주며 가치를 인정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도 아지 스미스는 안정된 수비를 보여줬다. 1991150경기에 출장해 단 8개의 실책만을 범해 내셔널리그 유격수 최고 기록을 세웠으며 1992년에는 13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Branch Rickey, Roberto Clemente의 기록을 넘어섰다. 하지만 이 수상이 그의 골든글러브 마지막 수상이었다.
 
1993년부터 아지 스미스는 무릎부상, 햄스트링부상, 체력부담으로 전성기의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다. 1994, 1995년 그는 부상이 심해져 100경기 이상 출전을 하지 못해 이대로 무너지는 것이 아닌가 의문을 갖게 했다. 19950.199의 타율로 자신의 역대 최소 타율을 보였지만 그는 부상을 떨치고 199641세의 나이로 0.282의 타율을 기록해 팬들을 즐겁게 했다.
 
하지만 그는 1996년 첫 부임한 Tony La Russa 감독(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감독)Royce Clayton을 중용하면서 은퇴를 결심. 1996619일 메이저리그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됐다. 그의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에는 팬들로 만원을 이뤘고 팬들은 그해 그를 팬투표 올스타로 만들어 통산 15번째 올스타게 되게 했다. 그의 등번호 1번은 현재 영구결번돼 있으며 현재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홈 구장인 뉴 부시 스타디움 외야에 그의 등번호가 적혀 있다.
 
그는 200291.7%의 득표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통산 타율 0.262...통산 홈런 28개를 기록했지만 그는 자신의 장점인 수비와 빠른발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그의 마법은 자기 자신을 믿었기에 또 팬들이 그를 믿어줬기에 가능했던 것이었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글러브는 많은 것을 줬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라 생각합니다. 모든 어린이들이 자신의 꿈을 키우길 바랍니다. 꿈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윤용운기자 / green20000@onst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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