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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KBL] 여자농구. 新르네상스 시대를 향하여

[WKBL] 여자농구. 新르네상스 시대를 향하여

  • 기자명 윤세호
  • 입력 2011.07.07 15:58
  • 수정 2014.11.11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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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 르네상스
 

<1967년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은 체코에서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환영행사를 받으며 귀국했다. 당시 한국 여자농구 선수들은 국민의 영웅이었다.>

마지막 승부, 슬램덩크, 마이클 조던, NBA, 그리고 프로농구

1990년대는 한국 농구의 황금기였다. 농구 대잔치의 주역인 ‘오빠 부대’선수들이 농구 붐 중심에 자리했고 드라마, 만화, 스포츠 브랜드까지 시너지 효과를 내며 전국에 농구공 소리가 가득했다.

농구 붐은 한국농구의 프로화를 이끌어 1997년 KBL, 1999년 WKBL이 출범했다. 어쩌면 앞으로 다시는 볼 수 없지도 모르는 ‘농구 광란’이 90년대를 휩쓸고 지나갔다.

하지만, 90년대 이전에도 농구 붐은 불었다. 그곳에는 오빠 부대도, 화려한 덩크슛도, TV 드라마도 없었지만 전 국민을 일희일비하게 했던 ‘여자농구’가 1960년대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여자농구 붐의 원인은 ‘실력’이었다. 1980년대 중반까지 대한민국 여자농구는 그야말로 탈아시아 수준이었다. 1967년 체코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를 시작으로 1983년 브라질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까지 한국 여자농구는 항상 세계 5위 안에 자리했다. 여자농구는 세계무대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종목이었고 자연스럽게 국민들의 관심과 환호를 이끌어냈다.

끝없는 추락
 

<1996년 농구대잔치 개막식. 1년 후 IMF 직격탄을 맞으면서 13개 팀이 해체, 겨우 5개 팀만 남게 됐다.>

국기(國伎)로 일컬어질 만큼 국민의 관심과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여자농구는 1984년 LA 올림픽에서 대한민국 구기 종목 최초의 은메달을 획득하면서 절정을 찍었지만 이후 추락을 거듭했다. 야구, 축구, 씨름이 프로화되어 이른바 ‘프로스포츠시대’가 왔고 여자농구는 순식간에 자리를 잃어버렸다.       

여자농구의 인기 저하는 국제대회 성적으로 직결됐다. 1986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10위로 밀려난 것을 시작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8팀 중 7위, 1990년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11위,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10위로 한국 여자농구는 몰락했다. 반등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아시아의 맹주 자리를 지키는 것도 위태로웠다. 국민들의 관심은 갈수록 멀어졌고 90년대 농구 붐도 남자 쪽에 편중되어 여자농구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략하는 듯했다.  

IMF로 한국 경제가 붕괴되면서, 선수들의 몸값 문제, 고교 선수 기근에 시달리던 여자농구는 그야말로 ‘끝장’이나 다름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고교 유망주의 몸값만 1억이 넘는 상황에서 IMF 직격탄에 휘청거리던 은행단 팀들은 적은 돈에 애걸복걸해야 했고 급기야 기업들의 여자농구단 해체 움직임까지 나타났다. 

부활의 불씨, 여자프로농구 출범
 

<잇따라 농구단이 해체되는 어려움 속에서 한국 여자농구는 프로화로 반전을 맞이한다.>

부활의 불씨를 살리는 법은 단 한 가지, 바로 ‘여자농구의 프로화’였고 일은 서둘러 진행됐다. 1998년 6월 30일 삼성생명, 현대산업개발, 상업은행, 국민은행, 신세계 등 5개 팀 관계자들이 한국여자농구연맹 임시총회를 열어 프로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기로 했고 당해 세미프로 형식으로 여름리그를 열었다.

여름리그가 끝난 후 사단범인 한국여자농구연맹(WKBL)이 출범, 농구원로인 이성구 총재, 조승연 전무 체제로 미국 WNBA에 이어 세계 두 번째로 한국에 여자프로농구가 탄생했다.

스포츠의 흥행논리는 간단하다. 선수들이 기량이 바탕이 된 멋있는 플레이, 흥미진진한 경기를 펼친다면 관중들은 알아서 찾아온다. 프로화는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자연스럽게 유도했고 활약한 선수들은 그만한 보상을 받았다.

연맹과 구단, 그리고 선수들이 합심하자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1999년 시즈오카 ABC대회에서 한국 여자농구대표팀은 일본을 꺾고 정상에 올라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출전권을 획득했다.  

김원길 체제로 거듭난 WKBL, 시드니 올림픽 트리플더블
 

<프로화와 함께 한국 여자농구는 성과를 거뒀다. 15년동안 세계 무대 변방에 자리했던 한국 여자농구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트리블더블과 함께 다시 일어났다.>

“내가 뭘 도와 드릴까요? 팀을 만들고 돈을 만들면 되는 거죠?”

자문자답이지만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준 한 마디였다. 1999년 12월 16일 김원길 의원이 WKBL의 제2대 총재로 취임했고 자신의 약속을 이내 실현했다. 기존 5개 구단으로 운영되던 조촐한 프로리그에 금호생명팀을 창단시켜 6구단 체제를 확립한 것이다.

2000년 4월, 여자프로농구 금호생명팀이 발족한 데 이어 김원길 총재는 자신의 두 번째 약속도 실현시켰다. 김원길 총재는 각 구단에 WKBL 운영기금을 내게 하고 돌아가며 스폰서를 맡게 했다. 그리고 방송사와 계약하여 중계권료를 챙겼다.

김원길 총재가 결코 쉽지 않은 ‘팀을 만들고 돈을 만드는 일’을 해내면서 한국 여자농구는 다시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여자농구 대표팀은 아시아를 대표해 맹활약, 4위를 차지하며 재도약을 이룩했다.

여자농구 대표팀은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는 러시아에 역사적인 승리를 거둬 B조 예선리그 3승 2패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예선리그 마지막 경기였던 쿠바전에선 대표팀의 전주원이 10득점 10리바운드 11어시스트로 64년 올림픽 농구 사상 최초의 트리플더블을 기록, 대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8강에서 프랑스를 꺾은 대표팀은 준결승에서 이 대회 우승팀 미국에 패해 브라질과의 3, 4위전을 벌였다. 전날 미국전에서 결승 진출을 위해 사력을 다한 대표팀은 브라질과의 동메달 쟁탈전에서 앞선 기량에도 체력적인 문제로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연장 끝에 73-84로 4위에 머물렀다.

대표팀은 비록 메달을 목에 걸진 못했지만 4위를 차지하며 1984년 이후 16년 만에 세계 정상권 재진입을 달성, 한국 여자농구의 부활을 알림과 동시에 아시아 농구의 체면까지 살렸다.

여자농구 재도약을 향한 김원길 총재의 마지막 도전
 

<김원길 총재는 여자농구에 대한 열정과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가장 오랫동안 한 단체를 이끌고 있다.>

프로화와 동시에 기량향상에 성공한 한국 여자농구는 시드니 올림픽 이후 2002년까지 고공행진을 이어가다 다시 추락했다. 2002년 중국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 대회에서 4위로 선전한 대표팀은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중국에 패하며 아시아 정상득극에 실패, 2004년 아테네 올림픽에선 최하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대표팀은 2007년 아시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하며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 부활을 노렸지만 8강 진출에 머물고 말았다. 이후 대표팀은 절치부심의 자세로 임했던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선 아쉽게 은메달에 그치고 말았다.

아시아의 패권을 내준 것과 동시에 여자프로농구도 농구의 전반적 인기하락과 함께 위기에 직면했다. 연맹은 7구단 체제를 지향하고 있지만 지금까지도 신생팀을 찾지 못하고 있다. 프로리그가 출범한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전반적인 인프라는 오히려 하락하고 있다. 여고팀 부족으로 전국대회조차 제대로 치르기 힘든 상황, 또다시 여자농구는 위기에 직면했다.

“12년째 총재를 맡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이 일을 했는데 그동안 내부적으로 잘못됐던 부분들을 바로 잡는 게 우선과제라고 생각해요. 차기 시즌이 여자농구 부흥기의 시작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1년 6월 27일 김원길 총재가 4선에 성공, 2014년까지 한국여자농구를 이끌게 됐다. 김원길 총재는 다가오는 2011-2012시즌을 여자농구의 부흥기로 만들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고무적인 것은 여자농구 부활을 위한 요소들이 하나둘씩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연맹 자체적으로 여자농구 인프라 확충과 유망주 육성을 위해 2008년부터 매년 ‘W-CAMP’를 개최하고 있고 농구팬들의 시청권 확보를 위해 2007년 1월부터 WKBL TV를 출범시켜 시즌 전 경기를 인터넷 생중계하고 있다. 거기에 연맹은 차기 시즌부터 여자농구 전문 블로그 등을 운영해 적극적인 온라인 홍보도 준비하고 있다.

고교출신 신인이 리그에 자리 잡기까지 4, 5년이 걸리고 프로구단의 드래프트 지명포기가 번번이 일어나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신인왕을 수상한 수원대 출신 윤미지(신한은행)도 여자농구에 희망을 선물했다.

아마추어 인프라가 타락을 거듭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단계별로 선수를 육성, 대학진학을 유도하여 여자농구가 엘리트체육에서 탈피하는 게 지금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윤미지의 신인왕 등극은 여자농구 시스템 재편을 유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WKBL의 가장 큰 문제점이 전력평준화의 실패였습니다. 강팀과 약팀이 뚜렷해서 경기에 흥미를 느낄 수가 없었어요. 그러나 시즌 후 은퇴선수들과 트레이드로 전력평준이 이뤄졌습니다.”

김원길 총재가 시인한 것처럼 그동안 WKBL은 신한은행의 독주로 ‘보나마나 뻔한 승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신한은행이 통합 5연패를 달성한 후 과감하게 리빌딩에 착수했고 상대적으로 기존 팀들의 전력은 강화됐다. 차기 시즌에는 상위권 팀 간의 1위 다툼과 함께 중위권 팀들이 치열한 4강 싸움을 벌일 확률이 높다.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긍정적이다. 2010-2011시즌 베스트5에 선정된 김정은(신세계), 김단비(신한은행), 이경은(KDB생명)은 앞으로 10년 이상 한국여자농구를 이끌어갈 재목들이다. 스타성을 겸비한 어린 선수들이 코트를 누비고 성장을 거듭하면 리그 흥행과 더불어 국제대회 경쟁력 또한 높일 수 있다.

지난 60년 동안 부침이 심했던 대한민국 여자농구가 새로운 부흥기를 위해 박차를 가하려 한다. 물론 쉽지 않은 도전이다. 그래도 아직 많은 사람들이 대한민국 여자농구가 지난 60년 동안 이룩했던 영광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농구팬들은 여자농구가 국기(國伎)였던 60~80년대를 추억하며 여자농구가 부활하길 바라고 있다.

다시 시작이다. 아마추어 농구의 활성화, 그리고 프로 리그의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부단히 노력한다면, 사람들의 발걸음은 다시 코트를 향하고 여자농구의 新르네상스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사진. 한국여자농구 연맹]

윤세호 기자 / drjose7@onst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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