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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평창올림픽스타디움은 해당화 가득한 돌밭이었다

100년 전 평창올림픽스타디움은 해당화 가득한 돌밭이었다

  • 기자명 이보미 기자
  • 입력 2018.02.20 11:34
  • 수정 2018.02.2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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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올림픽스타디움
평창올림픽스타디움

 

 

[STN스포츠=이보미 기자]

지금 대관령면의 어르신들은 횡계리의 변신이 놀랍기만 하다. 김광기 대관령노인회 사무장(81)은 동계올림픽이 대관령면의 백년 미래를 앞당긴 것 같다고 말할 정도이다.

어르신들은 횡계 시가지에서 이렇게 많은 외국인과 자동차를 보기도 처음이고, 집에서 창문을 열면 올림픽 시설들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것도 신기할 따름이다. 평창서 KTX 열차를 구경하게 될 줄도 몰랐다. 이제 열차타고 서울 가 보는 것이 희망사항이 됐다.

대관령면 어르신들이 이렇게 격세지감을 느끼며 감격하는 이유가 있다. 대관령면은 ‘농사 안되고, 돈 나올 구석 없고, 오뉴월에도 눈발 날리는 곳’ 이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지금의 올림픽플라자가 들어서있는 횡계8리는 해당화가 가득한 돌밭이었다. 대관령 어르신들은 주변으로 딱 6집이 있었는데, 너른 터를 특별한 사용할 방법이 없으니, 철길 침목으로 쓰일 목재를 잔뜩 쌓아두었다고 상기한다. 8.15해방 때는 그 자리에 면민들이 쏟아져 나와 만세를 불렀는데, 모인 인원이 200명이었다. 황병산과 발왕산 어간인 대관령면은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다. 집이나 세간이 완전히 초토가 돼 피난갔다 돌아온 주민들은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움막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대관령은 농사가 잘 안 되는 곳이었다. 물도 늘 부족해, 옆 동네 진부에서 물을 끌어 오느라 애를 먹었다. 화전으로 농토를 가꿀 수밖에 없었다. 김 사무장은 70년대, 제주도에서 들여온 무씨로 수확에 성공한 무를 ‘제무시’에 싣고 비포장 도로를 10시간 달려 서울에 내다 팔았던 일화를 어제 일처럼 기억한다.

그 후 고랭지 배추가 들어왔고, 감자 종자 개발이 진행되면서, 이 곳은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고랭지 농업 지역이 됐다. 그 시절 감자조합이 지금의 원예조합이 되었다. 농업은 2000년대 들어서야 파프리카, 딸기, 원예로 다양화됐다.

거친 땅을 일군 주민들은 돈이 조금이라도 되는 곳은 다 쫒아 다녔다.

김 사무장이 횡계4리 이장이었던 시절, 84년 개봉한 배창호 감독의 「그 해 겨울은 따뜻했네」영화 촬영이 횡계에서 진행됐다. 피난민 역할을 할 엑스트라를 모집한다기에, 주민들을 써달라고 제작진에 부탁을 해, 350명 출연으로 정해뒀는데, 당일 400명이 훌쩍 넘는 주민들이 촬영장에 나와 있어서 일당 7,000원을 6,000원으로 낮추고 다함께 엑스트라로 출연한 적도 있었다.

대관령의 칼바람은 할머니들도 억센 여장부로 만들었다. 감자를 심고 비료를 치는 양이 남자나 여자나 같은데도 배나 차이나는 품삯에 항의하며 기어이 같은 금액을 받아내곤 했다. 한 때 공판장을 운영하며 식재료부터 코흘리개 간식까지 취급하며 나름 사업을 일군 할머니들도 있다. 

살림이 조금 핀 것은 발왕산에 우리나라 최초의 스키장인 용평스키장이 들어서면서였다. 75년에 문을 연 용평스키장이 85년에 규모를 확장하면서 마을 주민들이 대거 임시직으로 고용됐다. 그 때부터 대관령의 형편이 피기 시작해, 90년대 들어 아파트와 고층건물이 하나 둘 들어서는, '눈에 보이는 발전’ 이 시작됐다.

무엇보다 대관령의 눈은 유난스러웠다. 한 번 오면 150cm가 훌쩍 넘었다. 먹을 것 없던 겨울철에, 그렇게 많은 눈이 쏟아지니, 산짐승들도 눈을 헤치고 다니기가 어려웠다. 그 덕에 ‘황병산 사냥놀이’로 전해져오는 겨울철 사냥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시절부터 이어져왔다. 눈만 내리면 설피(눈에 발에 빠지지 않도록 신발에 넓게 덧대는 도구)를 신고, 썰매(지금의 스키와 매우 유사하게 생긴 전통스키)를 타고 다니며 눈밭으로 동물들이 지나간 흔적을 찾아다녔다. 주로 노루가 많이 잡혔고, 사냥에 성공한 날은 온 동네 잔치였다. 겨울 사냥은 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다 명맥이 끊어졌다.

눈이 전봇대 꼭대기만큼 온 적도 있었다. 김 사무장 집도 당시에 이웃과 왕래가 끊겼고, 근처 8집이 눈 속에 갇혔다. 몇 주가 지난 후에 연락이 겨우 닿았는데, 다행히 사람들은 살아 있었지만, 양식이 모두 떨어져 그나마 형편이 나았었던 김 사무장의 어머니가 집집하다 먹을 것을 나눠주었던 일화가 있다. 그 때 눈 구덩이를 파헤치고 터널을 만들어 다녔는데, 전선을 발로 밟고 다닐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덕에 용평스키장이 생기기 훨씬 전부터 스키어들이 횡계를 찾아왔다. 박춘자 할머니(78)는 야산 2곳에 활강장을 만들고 스키를 즐기는 사람들을 동네 처녀들과 구경하곤 했다. 20대에 춘천에서 큰 물난리를 겪고, 아무것도 없는 빈 손으로 대관령에 터를 잡은 박 할머니는 대관령에서 처음 겪은 겨울을 ‘눈이 강산이었다’고 기억한다. 호롱불 켤 석유를 유리병에 담아 품에 안고 올라오던 때, 대관령의 겨울 바람이 얼마나 센지, 아직도 시렸던 손의 감각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의 올림픽플라자 자리는 그 시기에도 야산에 농토가 조금 있는 공터였다. 1970년에 도암중학교가 그 옆으로 들어섰지만, 주위에 예닐곱 정도의 주택이 띄엄띄엄 있었고, 80년대부터는 대관령의 추위와 칼바람을 백분 활용한 황태덕장으로 오랫동안 사용됐다.

변화는 작년부터 있었다. 2015년 도암중학교 이전이 본격화 돼 작년에 이전을 마쳤고, 황태덕장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겨, 올림픽플라자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리에 아름다운 조형물과 예쁜 간판들이 들어섰고, 올림픽 업무를 보러오는 젊은이들이 거리를 무리지어 지나다녔다.

대관령 어르신들은 눈 많이 오고 춥기만 한 두메라고만 생각했던 대관령면이 올림픽으로 천지개벽한 것이 내 자식 잘된 것 마냥 자랑스럽기만 하다. 어르신들은 그 사이 내 마을 깨끗이 하고, 오는 사람에게 친절히 대하며, 모두에게 편리한 질서를 지키자는 ‘굿매너 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올림픽 라스트마일 구간과 인접한 노인회 사무실 주변을 단장하고, 본인들의 게이트볼장을 쉼터로 내어 놓았다.

척박하다는 대관령을 억척스럽게 가꾸고 삶의 터전을 꾸려온 대관령의 어르신들은 본인들이 그래온 것처럼, 앞으로도 대관령이 세계적인 올림픽 도시로 계속하여 발전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아름다운 올림픽 도시를 만든 주인공은 바로 이들임도 확실하다.

 

 

사진=뉴시스/평창군

bomi8335@stnsport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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