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N스포츠=이상완 기자] “한 수 배운다는 마음으로…질 땐 지더라도 상대의 약점을 물고 끝까지 늘어져야…이겨주길 바라는 부담감은 주지 말자.”
44년 전, 1973년 3월 23일.
한국 테니스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일대의 사건이 일어난다. 아직까지도 회자가 될 정도의 충격적인 결말이다. 현재는 철거된 서울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 테니스 코트에서 ‘테니스 월드컵’이라 불리는 국가대항전 데이비스 컵 대회가 열렸다.
당시 한국 테니스는 세계 최하위권 수준으로, 이웃나라 일본과 비교해 6~70년 뒤처져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은 1960년도부터 데이비스 컵에 참가했는데, 일본을 상대로 단 한 번도 승리를 얻지 못했다.
늘 일본을 상대로 세트를 뺏는 것에 만족해야 했던 한국은 김성배(70) 현 전문해설위원의 등장으로 역사와 환경이 바뀌었다. 당시 김 위원은 가미와스미 준(일본)을 상대로 1시간 56분 만에 3대0 완승을 거뒀다. 일본 선수를 이긴 것도 충격적이었지만, 완승을 거두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이후 김 위원은 윔블던 대회 첫 출전 등 한국 테니스 최초라는 수식어의 대명사가 되었다.
김 위원이 개척자 정신으로 바꿔 놓은 테니스 환경에서 정현(69위‧삼성증권 후원)이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있다. 10대 시절부터 ‘한국 테니스의 희망’이라 불린 정현은 김 위원이 그랬듯 최초의 수식어를 만들어 가고 있다.
정현은 지난 달 28일부터 프랑스 파리 스타드롤랑가로스에서 열리고 있는 메이저 프랑스 오픈에 출전해 한국 선수로는 이형택(2004~05년) 이후 12년만, 개인 통산으로는 최초로 3회전에 진출했다.
이형택 이후 대형스타, 그 이상의 성적을 내주길 기대하는 테니스 팬들의 염원에 정현의 어깨는 무겁다. 3회전 상대는 일본의 ‘영웅’ 니시코리 케이(9위)와 한일전이 성사됐기 때문이다. 정현은 메이저 대회 첫 3회전, 강호 상대, 한일전이라는 삼중고(三重苦)를 이겨내야 하는 부담감을 잔뜩 안고 있다.
손자뻘이자, 한참 까마득한 후배를 지켜보는 원조 테니스의 희망이었던 김 위원은 정현에게 니시코리를 상대하는 방법과 조언, 국민과 팬들에게 바라는 점을 전했다.
2일 STN스포츠와 전화인터뷰에 나선 김 위원은 “니시코리는 세계적인 선수다. 반면 정현이는 성장하는 선수다. 비교를 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 입장에서 봤을 때에는 좋을 수는 있겠으나, 일본의 시선에서는 조금 좋지 않게 생각할 수 가 있다”면서 “(니시코리는) 세계랭킹 5, 6위를 다투는 선수이고, 정현이는 서서히 올라오는 선수이기 때문에 비교보다는 한국의 희망이라는 생각을 갖고 세계적인 니시코리에게 한 수 배운다라고 생각을 했으면 좋겠다”고 어깨에 짊어진 부담감을 내려놓아 주기를 바랐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적극적인 공격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김 위원은 “기술은 니시코리가 모든 면에서 앞서 있다”며 “정현이가 최근 포핸드 스트로크 등 공격적인 부분에서는 좋아지고 있지만 너무 공격하는 것은 화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 선수들이 상대의 공을 잘 받아 역습 등 경기 운영이 뛰어나다”면서 “이기기 위해서는 파워로 밀어붙여 보는 등 모험을 해야 한다. 그래도 한 수 배운다는 생각은 잊지 않았으면 한다”고 일본 선수들의 세밀함, 정확성 등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분명 두 선수 간의 벽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깰 수 없는 벽은 아니다. 일본 복수의 매체들은 니시코리가 1회전부터 어깨가 좋지 않아 통증이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니시코리 측은 크게 문제 될 게 없다며 대수롭게 넘겼지만 변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정밀하고 세밀한 힘을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 종목 특성상 어깨 통증은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정현이 집요하게 파고들고 힘으로 밀면 가능하다는 것이 김 위원의 시나리오다.
김 위원은 “(니시코리의 어깨 통증이) 변수가 될 수 있다. 2년 전부터 니시코리가 메이저 우승을 하게 될 거라고 예상을 해왔는데, 금년 들어서는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부진한 상황”이라며 “상대의 부진이 우리(정현)에게는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니시코리는 어깨 뿐 만 아니라 손목도 다쳐 오른 팔이 전부 다 고장이 났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부분이 나온다면 집중적으로 아픈 부분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져야 한다”며 “상대의 빈틈이 보이면 세상이 무너지고, 질 땐 지더라도 물고 늘어져야 한다”고 집요함을 가질 것을 주문했다.
김 위원은 정현이 니시코리를 이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지만 결코 부담감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도 당부했다.
김 위원은 “(정현이) 이겨낼 수 있을까하는 것은 국민적인 관심사다. 하지만 막 크는 선수에게 이겨주길 바라는 부담감을 주지는 말자”며 “늘 이길 수 있다(다음 라운드 진출)는 전제를 깔고 가는 것이 참 안타깝다. 테니스가 복싱처럼 단시간에 끝나는 종목이 아니기 때문에 이변이 일어나기가 쉽지는 않다”고 팬들도 니시코리와의 실력차를 인정해야 한다는 뜻으로 전했다.
그러면서도 김 위원은 “니시코리하고 발싸움에서 뒤쳐지지 않으니 (경기에) 적응하는 시간을 길게 가져가는 것이 상대를 대응하는 방법”이라고 나지막히 승리 비법을 남겼다.
사진=라코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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